선배녀 - 26부
달짝지근한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다보니 어느새 두 병을 비워냈다. 내가 와인에 약한 건지, 와인과 함께 하는 달콤한 분위기에 약한 건지 와인만 마시면 취기가 쉽게 오르는 거 같았다. 술이 오르는 만큼 우리의 분위기도 올라서 와인 맛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 멈추지 않고 계속 마시게 되었다.
어느덧 와인도 다 떨어져서 우리는 벽에 기대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은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진지하게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네가 보기에 나 매력 없어?”
“모든 남자들이 봐도 너 매력 있어.”
“아니, 다른 남자 다 필요 없고 네가 보기에 어떠냐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너랑 나랑 사귀고 있거나 내가 너한테 차였을 걸?”
“거짓말도 잘 하시네요.”
“거짓말 아냐.”
“우리가 언제 만났는데?”
내가 시은이를 만난 건 처음으로 동기들이랑 술 마실 때였다. 그러고 보니 소연이도 그날 처음 봤으니 소연이 때문에 시은이를 못 사귀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도서관에서?”
“이것 봐. 내가 너한테 전혀 매력이 없었으니 그때까지 내 존재도 모르고 있었잖아.”
“아냐. 장난친 거야. 그때 술자리에 있었잖아.”
“어쨌든 도서관에서 만나기 전에는 내 존재에 관심이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내가 왜?”
“네 표정이 차가웠으니까. 이렇게 해맑고 멍청한 앤 줄 몰랐던 거지.”
시은이는 귀엽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멍청한은 빼지?”
“좋아. 이렇게 해맑은 앤 줄 몰랐었어.”
“그럼 만약에 나 같은 애가 고백하면 어떻게 할 거야?”
“너 나한테 고백하게?”
“아니, 나 말고 나 같은 애!”
“지금은 소연이가 있으니 안 되겠지.”
“소연이가 없었다면?”
“내가 먼저 고백했을 거 같은데.”
나의 입바른 소리에 시은이는 활짝 웃었다. 시은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분 좋으라고 해준 얘기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하얀 거짓말은 아니었다. 시은이라면 정말 매력이 넘쳤다. 특히 나한테만 그런 매력을 뽐낸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랬기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시은이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아는 노래여서 나도 따라 흥얼거렸고, 그러자 시은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시은이의 노래에 맞춰 불렀고, 그렇게 우리는 듀엣으로 멋진 하모니를 만들었다. 한 곡이 끝나고 시은이가 또 다른 노래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곡 선택을 진짜 듀엣곡으로 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내가 아는 노래였기에 화음을 맞춰서 같이 불렀다. 노래가 후렴구에 왔을 때 나는 왠지 손을 잡고 불러야할 것 같았다. 시은이의 손을 잡자 시은이는 날 보며 싱긋 웃으면서 내 어깨에 기대왔다. 노래가 끝났지만 난 손을 놓지 않았다. 시은이의 머리도 내 어깨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연인 같다.”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소연이가 알면 뭐라고 할까?”
“내가 뭘? 친구랑 손잡을 수도 있는 거지.”
“그렇지. 우린 친구니까.”
시은이는 내 어깨에서 떨어졌고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욕실 안의 커다란 2인용 욕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몸이나 담그고 싶다.”
“담그고 와.”
“그럴까?”
“응. 내가 잘 담그고 있나 봐줄게.”
“미쳤나봐.”
“그럼 같이 담글까?”
“너 나한테 이러는 거 진짜 소연이한테 다 이른다.”
“친구니까 이런 농담하는 거야.”
“그놈의 친구 핑계로 다 한다고 하시겠어요.”
“다 뭐? 뭘 다 해?”
“그냥 다.”
“설마 그거 상상하는 건 아니지?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데 네가 발가벗고 있고 나도 발가벗고 있는 상태로 내일 아침까지 여기 같이 있어도 우린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넌 내가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아?”
“우린 친구니까.”
어떻게 여자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날 보고 웃을 때면 두근거리기도 하는데 말이다. 근데 머릿속에서 자꾸 이렇게 얘기를 하라고 시켰다. 이게 어쩌면 시은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꼭 이렇게 얘기해야 한다고 머리가 명령하고 있었다.
시은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진짜 몸 담그러 가?”
“응.”
시은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욕조에 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은 반투명유리로 되어 있었기에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였는데 시은이가 욕조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게 보였다.
“시은아, 물 받는 동안 나와 있어.”
물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 시은이에게 들리지 않았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목청을 높여 다시 말했다.
“시은아, 물 받는 동안 나와 있어.”
“됐어.”
욕실에서 울려 퍼져 내 귀에 들어온 시은이 목소리는 짧고도 간결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심심해서 컴퓨터를 만졌다. 웹서핑을 하는 동안 틈틈이 욕실을 봤는데 시은이는 욕조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대로 일어설 생각을 않고 있었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바뀌어 욕실을 쳐다봤다. 욕조에 물이 받아지고 있는 소리에 물이 넘치는 소리가 더해진 거 같았다. 그럼에도 시은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시은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욕조에서 비켜섰다. 그리고는 다시 쪼그리고 앉았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욕실에서 시은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시은이의 옷은 물에 젖어있었고 시은이의 울음에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괜찮아?”
시은이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울고 싶은 놈 뺨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시은이를 보니 미안했다. 나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은이가 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시은이가 그냥 친구로만 생각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모른 척 했다. 모르기를 바랐다. 모두 다 몰랐으면 했다. 그런 식으로 시은이를 잃고 싶진 않았다. 내 욕심이겠지만 지금 이렇게라도 계속 내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옷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야. 벗어줘. 내가 널어놓을게. 넌 씻고 나와.”
시은이는 내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난 그대로 돌아서며 말했다.
“나가있을 테니까 옷 벗어서 밖으로 내놔.”
난 밖으로 나가서 기다렸지만 끝내 옷은 나오지 않았다. 시은이가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타월로 몸을 닦는 모습은 보였지만 시은이가 나오기 전까지 옷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가운을 입고 나온 시은이는 옷을 널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나 잘 거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라는 생각은 안 했었다. 당연히 시은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은이가 자겠다고 했다. 나는 불을 끄고 시은이 옆으로 가서 누웠다.
시은이는 내게서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누웠다. 눈을 감고 자면서도 마주하기 싫은가보다. 적막을 깨고 시은이가 한 마디 했다.
“나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자는 것이다, 나는 자느라 못 들은 것이다, 나는 이미 잠이 들어 아무것도 못 들었기에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세뇌시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 다시 시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운도 벗었어.”
시은이한테 너무 미안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거 같았다. 이십년 동안 살아온 내가 아니었다. 나도 이런 내가 이상했지만 머리가 그러길 원했고 몸도 온전히 머리를 따르고 있었다.
“자?”
내가 대답을 않자 시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시은이가 날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얼굴에 시은이 손길이 느껴졌다. 시은이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손으로 기억했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시은이의 입술이 덮었다. 입술이 떨어지면서 손길도 떨어졌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시은이가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거렸지만 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떠오르는 빛을 본 것까지 기억이 났고 어느 순간 잠이 들었었다.
시은이가 깨워서 일어났을 때는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몇 시간 못 잔 건 분명한데 피곤한 기분은 없었다. 시은이도 기분이 상쾌한지 활짝 웃으며 내게 물을 내밀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시은이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너무나도 밝게 웃고 있는 시은이를 보니 어젯밤 일어난 일들이 꿈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마셨다. 속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내게 물 컵을 받아 갖다놓던 시은이는 구석에 박혀있는 종이가방을 발견했는지 종이가방을 내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뭐야?”
“아, 어제 서프라이즈 파티 소품들.”
시은이는 종이가방을 열어 안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런 거 안 했잖아?”
“그러게, 왜 안 했지?”
“치, 사놓긴 했는데 막상 하려니 귀찮았구나?”
“아냐, 있다는 걸 잊은 거뿐이야.”
“밥 먹어야지?”
“응. 시켜먹자.”
“그럼 중국집에서 시켜먹자. 나 울면 먹고 싶어.”
나도 당연히 울면을 먹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은이가 울면을 먹고 싶다고 하니 반가웠다. 그리고 또 한 번 느꼈다. 우린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은 친구라는 것을 말이다.
“나 다음 주에 소개팅 해.”
생뚱맞은 시은이의 발언이었지만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척 말했다.
“어떤 사람인데?”
“친구랑 같은 과 동기라는데 친구 말로는 괜찮대.”
“그래? 잘 해봐. 괜찮다싶으면 나한테 검사받는 거 잊지 말고.”
“너한테 검사를 왜 받아?”
“잊었어? 내가 널 아무나한테 안 보낸다고 했잖아.”
“치, 알았어.”
얼마 후 배달된 울면을 먹는데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담한 척 했더니 혀까지 담담해져서 감각을 상실한 듯 했다. 맛도 안 느껴지는 울면을 나는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랬음에도 갑자기 찾아온 허기가 아직 달래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은이가 남긴 것까지 다 먹었다. 그래도 배가 고픈 기분이었다.
시은이를 보내가 혼자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허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지만 몸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나는 구역질이 나서 공중화장실로 뛰어가 먹었던 울면을 토해냈다.
* * *
민기 형이 전화했을 때부터 불안했다. 할 말이 있으니 둘이서 한 잔 하자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안함의 실체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날 유리 누나와 섹스하려 했다는 걸 알아챈 것이라면 이제 와서 따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금 와서 유리 누나가 나랑 섹스 할 뻔 했다고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기 형이 내게 하고 싶은 얘기는 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언뜻 스친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혹시 어제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혜림이 누나와 모텔을 들락날락하던 모습을 말이다. 그게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커 보였다. 민기 형이 본 것이라면 진구 형이 아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진구 형과 함께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진구 형은 없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민기 형 앞에서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랐지만 민기 형은 취기를 빌려 얘기할 셈인지 술만 마실 뿐이었다. 가벼운 농담이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민기 형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민기 형은 내 말을 무시하고 술을 따라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진짜 쪽팔렸다.”
“네?”
“유리가 딴 놈들이랑 떡치고 다니든 말든 신경 안 썼어. 나도 그러고 다니니까.”
“네.”
“근데 그 딴 놈이 후배라서 쪽팔려 죽을 뻔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 알았는지,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이 뿐만 아니라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궁금하지?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 사람 내 마음을 읽었다. 무서웠다. 이 상황에서는 다들 나처럼 생각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섬뜩했다.
“어제 유리랑 싸웠어. 너희가 했을 거라는 건 이미 그날부터 눈치 채고 있었는데 어제 싸울 때 그 얘기했더니 이실직고하면서 배 째라 식으로 나오더라.”
나는 변명을 늘어놓으려다 참고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너 유리 좋아해?”
“아니요.”
“그럼 혜림이 좋아해?”
“네?”
“아, 어제 혜림이 얘기도 들었어. 어쨌든 좋아해?”
“아니요.”
“네가 좋아서 그랬다면 이해할 수도 있어. 아니, 이해는 안 되도 이해해보려고 노력은 했겠지. 근데 선배 여자들을 데리고 놀아나기만 한다는 게 이해되겠니?”
민기 형의 차분했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 표정도 점점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아니요.”
“내가 소연이랑 떡만 치면서 갖고 논다고 생각하면 기분 안 좋지?”
“네.”
“근데 씨발 너는 왜 그랬냐?”
결국 민기 형 입에서 욕이 나왔다. 욕먹어도 싼 나였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씨발, 대답을 해보라고!”
“죄송해요.”
“이 새끼야,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무슨 생각으로 선배들 여자 건드리고 다녔냐고 묻고 있잖아.”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하고, 손가락질 받는 게 마땅했다. 그렇지만 이기적인 나는 민기 형한테만 욕을 먹고 싶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 질러 망신당하게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답 안 해? 나 무시 하냐? 씨발, 그러니까 유리랑 놀아났겠지.”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전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소리 같았다. 실제로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형, 잘못했어요.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씨발, 없긴 뭐가 없어?”
민기 형은 분을 참기 힘들었는지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주먹이 날아 올 타이밍은 아닌 거 같았지만 혹시나 날아온다면 나는 그냥 맞아주어야 하나, 피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계속 욕먹으니까 열 받아?”
“아니요.”
“여자친구 하나 관리 못한 내가 병신인데 자꾸 너한테 지랄하니까 열 받겠지.”
민기 형은 날 뚫어져라 쏘아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야, 거기로 와.”
진구 형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따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이나 잘 막고 있어야겠다.
“씨발, 어디긴, 너랑 나랑 떡치는 모텔!”
진구 형을 부른 게 아니라서 다행이면서도 너무 쪽팔렸다. 사람들이 다 우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기 형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주위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전화하는 거 처음 보냐? 씨발.”
그냥 고개 돌리는 사람들, 비웃음을 던지는 사람들, 눈 마주치면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계속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이렇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귀여웠던 사람은 민기 형의 말에 욱해서 일어났는데 주위에서 만류해 다시 자리에 앉는 사람이었다.
“따라와.”
민기 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계산이나 하고 나가지 그냥 나가버려 나는 계산하고 따라 나갔다. 민기 형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고 나는 똥개마냥 졸졸 따라갔다.
모텔 방에 들어서자 민기 형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의자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여기 오는 사람은 분명 유리 누나일 텐데 유리 누나를 왜 하필 모텔로 부른 것인지 의문이었다. 유리 누나의 얼굴은 팔리지 않게 하려고 이런 곳에서 얘기하자고 부른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유리 누나와 나를 같이 죽이려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말로만 듣던 불륜남녀의 모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민기 형의 핸드폰이 울렸고, 민기 형은 방 호수만 말하고 끊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예상했던 대로 유리 누나가 들어왔다. 유리 누나는 내게 잠깐 눈길을 주고는 벽에 기대서서 민기 형을 보고 있었다. 민기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희 둘이 떡쳤다 이거지?”
엄연히 말하면 유리 누나와 나는 섹스까지 하진 않았다. 오럴 섹스도 섹스라면 했다고 할 수 있으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서로 섹스 할 마음을 갖고 있었고, 하기 직전까지는 갔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냐?”
유리 누나와 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민기 형은 계속해서 혼자 얘기했다.
“좋았으니까 좆나 대주고 박아대고 했겠지. 그렇게 좋으면 씨발 여기서 한 번 해. 내가 너희들 떡치라고 방도 빌려줬으니까 너희가 좋아하는 떡 마음껏 쳐봐.”
유리 누나와 나는 당연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씨발새끼들아 내 앞에서 그 짓거리 해보라고! 야, 정윤호!”
“네?”
“유리한테 박으라고!”
내가 또 대답을 않고 있자 화가 났는지 민기 형은 벌떡 일어났다.
“왜 못 해? 나 몰래 뒤에서 하지 말고 앞에서 당당하게 하라고 이 새끼야.”
“형, 제가 잘못했어요.”
“씨발 잘못했다는 소리는 그만하고 해보라고.”
민기 형은 유리 누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두 손으로 유리 누나의 남방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투두둑 하며 남방의 단추는 다 떨어져 나갔고, 유리 누나의 몸이 드러났다. 유리 누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민기 형을 쳐다보고 있을 뿐 몸을 가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벗기고 해보라고. 바지도 벗겨줘?”
“그만해요, 이제.”
민기 형은 내 말을 무시하며 유리 누나의 바지 단추를 풀려했고, 유리 누나는 민기 형의 손을 쳐냈다.
“가만있어, 씨발년아.”
다시 한 번 민기 형은 유리 누나의 바지 단추에 손을 가져갔고, 유리 누나는 민기 형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비록 민기 형의 손을 걷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민기 형 또한 유리 누나의 단추를 풀지도 못했다. 그러자 민기 형은 유리 누나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가만히 있어라.”
나는 달려가 쓰러진 유리 누나 앞에 막아섰다.
“그만 좀 하라고요.”
“넌 빠져.”
민기 형은 유리 누나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민기 형의 발길질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유리 누나는 민기 형에게 몇 번의 발길질을 당해야했다. 보다 못한 나는 민기 형을 밀어냈다. 몇 발자국 밀려난 민기 형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해보자는 거냐? 좋아.”
민기 형은 나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날려댔고 나는 가드를 올려 다 막았다. 내가 민기 형의 공격을 다 막아내자 민기 형은 전략을 바꿨는지 날 공격하다가 중간에 한 번씩 유리 누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내 몸을 막기도 벅찬 상황이었기에 유리 누나에게 향하는 공격까지는 막아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도 전략을 바꿨다. 나는 유리 누나를 내 몸으로 덮었고, 신나게 발길질을 맞아야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픈 공격도 여러 차례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민기 형을 때려눕히고 싶은 순간은 더 많았다. 그래도 꿋꿋이 참고 버텼다. 내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참고 또 참고 계속해서 참았다.
한참을 때리던 민기 형은 지쳤는지 발길질을 멈추었다. 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민기 형은 침대에 걸터앉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기 형과 나는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민기 형은 체력이 회복 되었는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유리 누나를 꼭 감쌌다. 민기 형은 내 머리를 짓밟으며 말했다.
“지랄들을 하고 계세요. 꼴 보기가 아주 좋아요.”
내 머리에서 민기 형의 발이 떨어지고는 퉤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에 무언가 날아와 달라붙었고, 민기 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민기 형의 발걸음 소리는 멀어지더니 쾅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유리 누나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많이 아팠을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을 것이다. 남자친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발길질이 멈췄지만 계속해서 유리 누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유리 누나는 여전히 많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나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몸을 움직이니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넌 왜 멍청하게 맞고만 있어? 그럴 거면 나한테 어떻게 하든 가만 놔두지.”
나는 유리 누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나는 잘못 없지만 저는 잘못했으니까요.”
“멍청이.”
유리 누나는 날 꼭 안아주었다. 내가 불쌍해서 안아준 것인지 고마워서 안아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유 불문하고 날 안아주지 않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유리 누나에게 안기면서 난 몸이 끊어져나가는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너 괜찮아? 좀 쉬다 가.”
“민기 형이 다시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빨리 나가요.”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걷는 것도 내게는 곤욕이었지만 나는 끝까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택시를 잡아 태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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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와인도 다 떨어져서 우리는 벽에 기대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은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진지하게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네가 보기에 나 매력 없어?”
“모든 남자들이 봐도 너 매력 있어.”
“아니, 다른 남자 다 필요 없고 네가 보기에 어떠냐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너랑 나랑 사귀고 있거나 내가 너한테 차였을 걸?”
“거짓말도 잘 하시네요.”
“거짓말 아냐.”
“우리가 언제 만났는데?”
내가 시은이를 만난 건 처음으로 동기들이랑 술 마실 때였다. 그러고 보니 소연이도 그날 처음 봤으니 소연이 때문에 시은이를 못 사귀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도서관에서?”
“이것 봐. 내가 너한테 전혀 매력이 없었으니 그때까지 내 존재도 모르고 있었잖아.”
“아냐. 장난친 거야. 그때 술자리에 있었잖아.”
“어쨌든 도서관에서 만나기 전에는 내 존재에 관심이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내가 왜?”
“네 표정이 차가웠으니까. 이렇게 해맑고 멍청한 앤 줄 몰랐던 거지.”
시은이는 귀엽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멍청한은 빼지?”
“좋아. 이렇게 해맑은 앤 줄 몰랐었어.”
“그럼 만약에 나 같은 애가 고백하면 어떻게 할 거야?”
“너 나한테 고백하게?”
“아니, 나 말고 나 같은 애!”
“지금은 소연이가 있으니 안 되겠지.”
“소연이가 없었다면?”
“내가 먼저 고백했을 거 같은데.”
나의 입바른 소리에 시은이는 활짝 웃었다. 시은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분 좋으라고 해준 얘기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하얀 거짓말은 아니었다. 시은이라면 정말 매력이 넘쳤다. 특히 나한테만 그런 매력을 뽐낸다는 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랬기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시은이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아는 노래여서 나도 따라 흥얼거렸고, 그러자 시은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시은이의 노래에 맞춰 불렀고, 그렇게 우리는 듀엣으로 멋진 하모니를 만들었다. 한 곡이 끝나고 시은이가 또 다른 노래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곡 선택을 진짜 듀엣곡으로 했다. 다행히 이번에도 내가 아는 노래였기에 화음을 맞춰서 같이 불렀다. 노래가 후렴구에 왔을 때 나는 왠지 손을 잡고 불러야할 것 같았다. 시은이의 손을 잡자 시은이는 날 보며 싱긋 웃으면서 내 어깨에 기대왔다. 노래가 끝났지만 난 손을 놓지 않았다. 시은이의 머리도 내 어깨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연인 같다.”
“네가 이러고 다니는 거 소연이가 알면 뭐라고 할까?”
“내가 뭘? 친구랑 손잡을 수도 있는 거지.”
“그렇지. 우린 친구니까.”
시은이는 내 어깨에서 떨어졌고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욕실 안의 커다란 2인용 욕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몸이나 담그고 싶다.”
“담그고 와.”
“그럴까?”
“응. 내가 잘 담그고 있나 봐줄게.”
“미쳤나봐.”
“그럼 같이 담글까?”
“너 나한테 이러는 거 진짜 소연이한테 다 이른다.”
“친구니까 이런 농담하는 거야.”
“그놈의 친구 핑계로 다 한다고 하시겠어요.”
“다 뭐? 뭘 다 해?”
“그냥 다.”
“설마 그거 상상하는 건 아니지? 혹시나 해서 얘기하는데 네가 발가벗고 있고 나도 발가벗고 있는 상태로 내일 아침까지 여기 같이 있어도 우린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넌 내가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아?”
“우린 친구니까.”
어떻게 여자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날 보고 웃을 때면 두근거리기도 하는데 말이다. 근데 머릿속에서 자꾸 이렇게 얘기를 하라고 시켰다. 이게 어쩌면 시은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꼭 이렇게 얘기해야 한다고 머리가 명령하고 있었다.
시은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진짜 몸 담그러 가?”
“응.”
시은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욕조에 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은 반투명유리로 되어 있었기에 어렴풋한 실루엣이 보였는데 시은이가 욕조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게 보였다.
“시은아, 물 받는 동안 나와 있어.”
물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혀 시은이에게 들리지 않았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목청을 높여 다시 말했다.
“시은아, 물 받는 동안 나와 있어.”
“됐어.”
욕실에서 울려 퍼져 내 귀에 들어온 시은이 목소리는 짧고도 간결했다. 혼자 남겨진 나는 심심해서 컴퓨터를 만졌다. 웹서핑을 하는 동안 틈틈이 욕실을 봤는데 시은이는 욕조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대로 일어설 생각을 않고 있었다.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바뀌어 욕실을 쳐다봤다. 욕조에 물이 받아지고 있는 소리에 물이 넘치는 소리가 더해진 거 같았다. 그럼에도 시은이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시은이는 벌떡 일어나더니 욕조에서 비켜섰다. 그리고는 다시 쪼그리고 앉았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욕실에서 시은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시은이의 옷은 물에 젖어있었고 시은이의 울음에는 짜증이 섞여있었다.
“괜찮아?”
시은이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울고 싶은 놈 뺨 한 대 얻어맞은 것 마냥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시은이를 보니 미안했다. 나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은이가 날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시은이가 그냥 친구로만 생각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모른 척 했다. 모르기를 바랐다. 모두 다 몰랐으면 했다. 그런 식으로 시은이를 잃고 싶진 않았다. 내 욕심이겠지만 지금 이렇게라도 계속 내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옷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야. 벗어줘. 내가 널어놓을게. 넌 씻고 나와.”
시은이는 내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난 그대로 돌아서며 말했다.
“나가있을 테니까 옷 벗어서 밖으로 내놔.”
난 밖으로 나가서 기다렸지만 끝내 옷은 나오지 않았다. 시은이가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타월로 몸을 닦는 모습은 보였지만 시은이가 나오기 전까지 옷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가운을 입고 나온 시은이는 옷을 널고 침대로 가서 누웠다.
“나 잘 거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라는 생각은 안 했었다. 당연히 시은이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은이가 자겠다고 했다. 나는 불을 끄고 시은이 옆으로 가서 누웠다.
시은이는 내게서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누웠다. 눈을 감고 자면서도 마주하기 싫은가보다. 적막을 깨고 시은이가 한 마디 했다.
“나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자는 것이다, 나는 자느라 못 들은 것이다, 나는 이미 잠이 들어 아무것도 못 들었기에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세뇌시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또 다시 시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운도 벗었어.”
시은이한테 너무 미안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닌 거 같았다. 이십년 동안 살아온 내가 아니었다. 나도 이런 내가 이상했지만 머리가 그러길 원했고 몸도 온전히 머리를 따르고 있었다.
“자?”
내가 대답을 않자 시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 시은이가 날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얼굴에 시은이 손길이 느껴졌다. 시은이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손으로 기억했다. 그리고는 내 입술을 시은이의 입술이 덮었다. 입술이 떨어지면서 손길도 떨어졌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시은이가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거렸지만 나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떠오르는 빛을 본 것까지 기억이 났고 어느 순간 잠이 들었었다.
시은이가 깨워서 일어났을 때는 열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몇 시간 못 잔 건 분명한데 피곤한 기분은 없었다. 시은이도 기분이 상쾌한지 활짝 웃으며 내게 물을 내밀었다. 언제 일어났는지 시은이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너무나도 밝게 웃고 있는 시은이를 보니 어젯밤 일어난 일들이 꿈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 다 마셨다. 속이 깨끗하게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내게 물 컵을 받아 갖다놓던 시은이는 구석에 박혀있는 종이가방을 발견했는지 종이가방을 내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뭐야?”
“아, 어제 서프라이즈 파티 소품들.”
시은이는 종이가방을 열어 안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런 거 안 했잖아?”
“그러게, 왜 안 했지?”
“치, 사놓긴 했는데 막상 하려니 귀찮았구나?”
“아냐, 있다는 걸 잊은 거뿐이야.”
“밥 먹어야지?”
“응. 시켜먹자.”
“그럼 중국집에서 시켜먹자. 나 울면 먹고 싶어.”
나도 당연히 울면을 먹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은이가 울면을 먹고 싶다고 하니 반가웠다. 그리고 또 한 번 느꼈다. 우린 비슷한 점이 굉장히 많은 친구라는 것을 말이다.
“나 다음 주에 소개팅 해.”
생뚱맞은 시은이의 발언이었지만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척 말했다.
“어떤 사람인데?”
“친구랑 같은 과 동기라는데 친구 말로는 괜찮대.”
“그래? 잘 해봐. 괜찮다싶으면 나한테 검사받는 거 잊지 말고.”
“너한테 검사를 왜 받아?”
“잊었어? 내가 널 아무나한테 안 보낸다고 했잖아.”
“치, 알았어.”
얼마 후 배달된 울면을 먹는데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담담한 척 했더니 혀까지 담담해져서 감각을 상실한 듯 했다. 맛도 안 느껴지는 울면을 나는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랬음에도 갑자기 찾아온 허기가 아직 달래지지 않았다. 그래서 시은이가 남긴 것까지 다 먹었다. 그래도 배가 고픈 기분이었다.
시은이를 보내가 혼자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허기가 느껴지는 기분이었지만 몸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나는 구역질이 나서 공중화장실로 뛰어가 먹었던 울면을 토해냈다.
* * *
민기 형이 전화했을 때부터 불안했다. 할 말이 있으니 둘이서 한 잔 하자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안함의 실체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날 유리 누나와 섹스하려 했다는 걸 알아챈 것이라면 이제 와서 따지진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금 와서 유리 누나가 나랑 섹스 할 뻔 했다고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기 형이 내게 하고 싶은 얘기는 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언뜻 스친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혹시 어제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혜림이 누나와 모텔을 들락날락하던 모습을 말이다. 그게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커 보였다. 민기 형이 본 것이라면 진구 형이 아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진구 형과 함께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진구 형은 없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민기 형 앞에서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바랐지만 민기 형은 취기를 빌려 얘기할 셈인지 술만 마실 뿐이었다. 가벼운 농담이라도 해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런 얘기를 하기에는 민기 형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민기 형은 내 말을 무시하고 술을 따라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진짜 쪽팔렸다.”
“네?”
“유리가 딴 놈들이랑 떡치고 다니든 말든 신경 안 썼어. 나도 그러고 다니니까.”
“네.”
“근데 그 딴 놈이 후배라서 쪽팔려 죽을 뻔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 알았는지,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이 뿐만 아니라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궁금하지?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 사람 내 마음을 읽었다. 무서웠다. 이 상황에서는 다들 나처럼 생각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섬뜩했다.
“어제 유리랑 싸웠어. 너희가 했을 거라는 건 이미 그날부터 눈치 채고 있었는데 어제 싸울 때 그 얘기했더니 이실직고하면서 배 째라 식으로 나오더라.”
나는 변명을 늘어놓으려다 참고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너 유리 좋아해?”
“아니요.”
“그럼 혜림이 좋아해?”
“네?”
“아, 어제 혜림이 얘기도 들었어. 어쨌든 좋아해?”
“아니요.”
“네가 좋아서 그랬다면 이해할 수도 있어. 아니, 이해는 안 되도 이해해보려고 노력은 했겠지. 근데 선배 여자들을 데리고 놀아나기만 한다는 게 이해되겠니?”
민기 형의 차분했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 표정도 점점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아니요.”
“내가 소연이랑 떡만 치면서 갖고 논다고 생각하면 기분 안 좋지?”
“네.”
“근데 씨발 너는 왜 그랬냐?”
결국 민기 형 입에서 욕이 나왔다. 욕먹어도 싼 나였기에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씨발, 대답을 해보라고!”
“죄송해요.”
“이 새끼야, 사과하라는 게 아니잖아. 무슨 생각으로 선배들 여자 건드리고 다녔냐고 묻고 있잖아.”
내가 잘못한 건 인정하고, 손가락질 받는 게 마땅했다. 그렇지만 이기적인 나는 민기 형한테만 욕을 먹고 싶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소리 질러 망신당하게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답 안 해? 나 무시 하냐? 씨발, 그러니까 유리랑 놀아났겠지.”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전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소리 같았다. 실제로 그럴지도 몰랐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형, 잘못했어요.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씨발, 없긴 뭐가 없어?”
민기 형은 분을 참기 힘들었는지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주먹이 날아 올 타이밍은 아닌 거 같았지만 혹시나 날아온다면 나는 그냥 맞아주어야 하나, 피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했다. 나는 웃음을 참으려고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계속 욕먹으니까 열 받아?”
“아니요.”
“여자친구 하나 관리 못한 내가 병신인데 자꾸 너한테 지랄하니까 열 받겠지.”
민기 형은 날 뚫어져라 쏘아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했다.
“야, 거기로 와.”
진구 형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따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이나 잘 막고 있어야겠다.
“씨발, 어디긴, 너랑 나랑 떡치는 모텔!”
진구 형을 부른 게 아니라서 다행이면서도 너무 쪽팔렸다. 사람들이 다 우리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기 형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주위를 향해 소리 질렀다.
“전화하는 거 처음 보냐? 씨발.”
그냥 고개 돌리는 사람들, 비웃음을 던지는 사람들, 눈 마주치면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계속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이렇게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귀여웠던 사람은 민기 형의 말에 욱해서 일어났는데 주위에서 만류해 다시 자리에 앉는 사람이었다.
“따라와.”
민기 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계산이나 하고 나가지 그냥 나가버려 나는 계산하고 따라 나갔다. 민기 형은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고 나는 똥개마냥 졸졸 따라갔다.
모텔 방에 들어서자 민기 형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의자에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여기 오는 사람은 분명 유리 누나일 텐데 유리 누나를 왜 하필 모텔로 부른 것인지 의문이었다. 유리 누나의 얼굴은 팔리지 않게 하려고 이런 곳에서 얘기하자고 부른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유리 누나와 나를 같이 죽이려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말로만 듣던 불륜남녀의 모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다.
민기 형의 핸드폰이 울렸고, 민기 형은 방 호수만 말하고 끊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예상했던 대로 유리 누나가 들어왔다. 유리 누나는 내게 잠깐 눈길을 주고는 벽에 기대서서 민기 형을 보고 있었다. 민기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희 둘이 떡쳤다 이거지?”
엄연히 말하면 유리 누나와 나는 섹스까지 하진 않았다. 오럴 섹스도 섹스라면 했다고 할 수 있으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서로 섹스 할 마음을 갖고 있었고, 하기 직전까지는 갔으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냐?”
유리 누나와 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민기 형은 계속해서 혼자 얘기했다.
“좋았으니까 좆나 대주고 박아대고 했겠지. 그렇게 좋으면 씨발 여기서 한 번 해. 내가 너희들 떡치라고 방도 빌려줬으니까 너희가 좋아하는 떡 마음껏 쳐봐.”
유리 누나와 나는 당연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씨발새끼들아 내 앞에서 그 짓거리 해보라고! 야, 정윤호!”
“네?”
“유리한테 박으라고!”
내가 또 대답을 않고 있자 화가 났는지 민기 형은 벌떡 일어났다.
“왜 못 해? 나 몰래 뒤에서 하지 말고 앞에서 당당하게 하라고 이 새끼야.”
“형, 제가 잘못했어요.”
“씨발 잘못했다는 소리는 그만하고 해보라고.”
민기 형은 유리 누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두 손으로 유리 누나의 남방을 잡아 양쪽으로 벌렸다. 투두둑 하며 남방의 단추는 다 떨어져 나갔고, 유리 누나의 몸이 드러났다. 유리 누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민기 형을 쳐다보고 있을 뿐 몸을 가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벗기고 해보라고. 바지도 벗겨줘?”
“그만해요, 이제.”
민기 형은 내 말을 무시하며 유리 누나의 바지 단추를 풀려했고, 유리 누나는 민기 형의 손을 쳐냈다.
“가만있어, 씨발년아.”
다시 한 번 민기 형은 유리 누나의 바지 단추에 손을 가져갔고, 유리 누나는 민기 형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비록 민기 형의 손을 걷어낼 수는 없었지만 그 때문에 민기 형 또한 유리 누나의 단추를 풀지도 못했다. 그러자 민기 형은 유리 누나의 뺨을 후려갈기며 말했다.
“좋은 말 할 때 가만히 있어라.”
나는 달려가 쓰러진 유리 누나 앞에 막아섰다.
“그만 좀 하라고요.”
“넌 빠져.”
민기 형은 유리 누나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민기 형의 발길질까지 막지는 못했다. 그래서 유리 누나는 민기 형에게 몇 번의 발길질을 당해야했다. 보다 못한 나는 민기 형을 밀어냈다. 몇 발자국 밀려난 민기 형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해보자는 거냐? 좋아.”
민기 형은 나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날려댔고 나는 가드를 올려 다 막았다. 내가 민기 형의 공격을 다 막아내자 민기 형은 전략을 바꿨는지 날 공격하다가 중간에 한 번씩 유리 누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내 몸을 막기도 벅찬 상황이었기에 유리 누나에게 향하는 공격까지는 막아줄 순 없었다. 그래서 나도 전략을 바꿨다. 나는 유리 누나를 내 몸으로 덮었고, 신나게 발길질을 맞아야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픈 공격도 여러 차례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민기 형을 때려눕히고 싶은 순간은 더 많았다. 그래도 꿋꿋이 참고 버텼다. 내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참고 또 참고 계속해서 참았다.
한참을 때리던 민기 형은 지쳤는지 발길질을 멈추었다. 숨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민기 형은 침대에 걸터앉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기 형과 나는 서로의 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민기 형은 체력이 회복 되었는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유리 누나를 꼭 감쌌다. 민기 형은 내 머리를 짓밟으며 말했다.
“지랄들을 하고 계세요. 꼴 보기가 아주 좋아요.”
내 머리에서 민기 형의 발이 떨어지고는 퉤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에 무언가 날아와 달라붙었고, 민기 형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민기 형의 발걸음 소리는 멀어지더니 쾅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유리 누나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많이 아팠을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을 것이다. 남자친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발길질이 멈췄지만 계속해서 유리 누나를 감싸주고 있었다.
유리 누나는 여전히 많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나도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몸을 움직이니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넌 왜 멍청하게 맞고만 있어? 그럴 거면 나한테 어떻게 하든 가만 놔두지.”
나는 유리 누나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누나는 잘못 없지만 저는 잘못했으니까요.”
“멍청이.”
유리 누나는 날 꼭 안아주었다. 내가 불쌍해서 안아준 것인지 고마워서 안아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유 불문하고 날 안아주지 않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유리 누나에게 안기면서 난 몸이 끊어져나가는 줄 알았으니까 말이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너 괜찮아? 좀 쉬다 가.”
“민기 형이 다시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빨리 나가요.”
우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급하게 걷는 것도 내게는 곤욕이었지만 나는 끝까지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 누나를 집까지 데려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택시를 잡아 태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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